2023. 4. 10. 21:07ㆍ헤드폰
"DCA 익스팬스의 존재 목적은 단 하나, 그 어떤 감정이나 양념이나 잔재도 없이 가장 깨끗한 소리를 전달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 헤드폰의 감상문에서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방식으로 소리를 깨끗하게 '전송'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글.사진 : 루릭 (blog.naver.com/luric)
2023년 현재, 하이엔드 헤드폰 세계에서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플래너 마그네틱)는 일종의 표준으로 정착했다. 극히 얇은 진동판을 넓게 펼치고 그 면적에 해당하는 자석 패널의 자기장으로 소리를 내는데, 이 기술은 정전형 드라이버 수준으로 정밀한 고음을 재생하며 더욱 중후한 저음을 만들 수 있어서 수백만원대 헤드폰의 주요 메뉴가 되고 있다.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는 다이내믹 드라이버보다 소리의 변화폭이 작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회사에서 각기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초저음이 보강된 플랫 사운드'의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바탕에서 서로 다른 하우징 소재와 이어패드 구조 등의 변화를 통해 차이점을 내는 것이 대략적 추세가 되겠다.
그런데... 여러 평판형 헤드폰 회사 중에서도 '댄 클락 오디오(Dan Clark Audio)'는 유독 특이한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은 브랜드가 '미스터 스피커즈(Mr.Speakers)'였던 시절에도 '정전형 헤드폰 소리를 추구하는 평판형 헤드폰'을 만들었지만, DCA가 된 지금은 굉장한 가격의 평판형 헤드폰과 정전형 헤드폰 모델을 모두 보유하고 있으며 사운드 시그니처는 더욱 더 플랫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오늘 소개할 초고가 모델 '익스팬스(Expanse)'는 그 중에서도 가장 평탄하며 극한의 소리 해상도를 추구하는 제품이다. 예전에 다뤘던 '스텔스(Stealth)'의 개방형 버전이라고 해도 될 텐데, 스텔스의 소리에 개방감만 더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복합적인 차이점을 보여준다. 사실상 완전히 다른 헤드폰이라고 해도 될 정도라서 이렇게 리뷰를 시작하게 됐다.
*댄 클락 오디오 스텔스 리뷰 링크
https://blog.naver.com/luric/222584485257
쉽게 휴대하는 폴딩 구조 + 특별한 그릴 디자인
댄 클락 오디오 익스팬스는 고가 품목이고 그에 걸맞게 큰 박스와 큰 케이스로 포장되어 배송된다. 하지만 실제 구성품은 단출한 편이다. 이 제품은 귀 전체를 덮는 대형 헤드폰에 속하지만 영리한 폴딩 메커니즘으로 작게 접어서 휴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게 접은 헤드폰을 담는 하드 케이스와 간단히 분리할 수 있는 케이블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케이블을 케이스에 함께 담을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함께 담고 다니면 케이블의 커넥터 플러그가 비싼 헤드폰에 흠집을 낼 수도 있으니 케이블을 따로 들고 다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익스팬스의 기본 케이블은 'VIVO'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며 별도로 구입한다면 가격이 300달러를 넘는 제품이다. 은 도금 동선 소재의 이 케이블은 유연한 직조물 피복을 지녔으며 DCA의 고급형 헤드폰들에서 선명한 소리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정전형 헤드폰 보체(VOCE)에서 처음 등장한 후 스텔스와 익스팬스에도 기본 탑재되는 것이다. 4핀의 DCA 전용 커넥터는 간단한 클릭의 탈착 구조라서 수없이 분리와 결합을 반복해도 멀쩡하게 유지된다.
헤드폰 디자인이 이렇게 특이할 수가 있을까? - 이런 생각이 든다. 익스팬스의 이어컵은 두껍고 단단한 알루미늄으로 제작됐으며 이어컵 내부에는 카본 파이버 배플이 들어 있다. 여기까지는 스텔스의 구조인데, 익스팬스는 개방형 디자인이 되면서 굉장히 입체적이며 유기적인 패턴의 그릴을 보유하게 됐다. 그릴의 안쪽에는 파랑색의 직조물 필터가 있어서 먼지 유입을 원천 차단하며 이어패드는 가죽과 스웨이드의 혼합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어패드 속으로는 스텔스와 익스팬스의 기술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AMTS 부품이 보인다.
유저의 머리 위로 자연스럽게 덮이는 가죽 헤드밴드는 안쪽 쿠션에 파랑색 스티치가 있어서 빨강색 테마의 스텔스와 대조된다. 익스팬스의 이어패드를 눌러주는 헤드밴드 프레임은 니켈과 티타늄의 합금 소재라서 마음대로 구부리고 늘려도 원래 형태로 돌아온다. 묵직한 알루미늄 소재의 이어컵을 사용했고 자석 패널의 무게도 늘어났지만, 여전히 400g대의 가벼운 헤드폰이라서 장기간 착용해도 편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주관적으로 봐도, 익스팬스의 디자인은 첨단 기술 연구소에서 방금 탈출한 듯한 모습이다. 국내 가격이 500만원을 넘는데 컬렉션 아이템으로써 시각적으로 볼 거리가 없는 점은 아쉬울 수 있겠다. 작게 접어서 휴대할 수 있고, 가볍고 편하게 오랫동안 착용할 수 있으며, 제품의 마감 완성도가 매우 높은 점은 좋지만, 가격이 너무나 비싼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익스팬스의 소리를 청음 매장에서 직접 들어본다면... 굉장한 가격 만큼이나 충격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물건의 소리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SOUND
*개방형 헤드폰인데 누음이 적고 공간 확장이 없는 이유
분명히 개방형 헤드폰인데 소리가 많이 새어나가지 않는다. 개방형 헤드폰들 중에는 드라이버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크게 만들어서 개방감을 더하는 제품이 있다. (예: AKG K812) 이런 헤드폰들은 옆에 있는 사람도 음악을 다 듣게 될 정도로 누음이 많다. 그런데 익스팬스의 소리 새는 정도는 베이스 포트가 뚫린 밀폐형 헤드폰의 수준이다. 밀폐형 헤드폰인 스텔스는 개방형 헤드폰 이상으로 넓은 스테이지를 만든다. 그런데 개방형 헤드폰인 익스팬스는 다른 밀폐형 헤드폰 수준의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Head-Fi.org 댄 클락씨 인터뷰 영상
이는 댄 클락 오디오가 만드는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의 구조에 의한 현상이라고 한다. 이 회사에서 만드는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외부 소음이 잘 들어오지 않으며 드라이버 소리가 새어나가는 분량도 적다. 이 드라이버를 밀폐형 이어컵에 넣으면 개방된 소리가 되고, 개방형 이어컵에 넣으면 보다 밀폐된 소리가 된다. 그래서 익스팬스는 음악 속의 모든 것이 귀에 가깝게 들린다. 수평선 모양의 사운드 이미지가 머리 속에 깨끗하게 맺히며 초저음만 귀 아래쪽으로 낮게 깔리는 느낌이 있다.
*고출력의 거치형 헤드폰 앰프가 필요하다
익스팬스는 스텔스처럼 구동이 어려운 헤드폰이지만 소형 헤드폰 앰프에서도 볼륨을 많이 올려주면 굵은 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예: 그레이스 디자인 M900, 코드 모조 2) 그러나 고출력의 거치형 헤드폰 앰프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리뷰 사이트에 공개된 정보를 보니 스텔스와 익스팬스의 드라이버 감도는 86~87dB에 불과하다. 드라이버 감도가 90dB대인 헤드폰도 구동하기가 어려운데 80dB대를 찍다니 한 편으로는 신기할 지경이다. 드라이버의 낮은 효율은 댄 클락 오디오가 미스터 스피커즈였던 시절부터 계속 남겨온 과제이며 앞으로도 유지될 것 같다. 이 메이커 특유의 소리를 내는 평판형 자석 드라이버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낮은 드라이버 감도는 앰프의 노이즈를 줄여주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스텔스와 다르게 설계된 AMTS
스텔스와 익스팬스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하드웨어를 사용한다. 두 형제 모델 간의 소리 차이를 만드는 원인은 '이어컵 디자인'과 '서로 다르게 설계된 AMTS'라고 한다. AMTS(Acoustic Metamaterial Tuning System)는 음파의 속성을 사람이 원하는 대로 바꿔주는 메타 물질 기술이다. 댄 클락 오디오의 AMTS는 주로 5kHz 영역에서 동작하며, 메타 물질의 구조와 형태를 통해서 헤드폰의 소리를 정밀하게 설정할 수 있다. 그래서 혹시 스텔스의 AMTS 파트를 익스팬스에 끼운다면 소리가 망가지게 된다.
또한 익스팬스의 AMTS는 사운드 웨이브의 방향이 조금 다른 듯하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사운드 이미지가 귀 아래쪽으로 낮게 깔리는 현상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쉽지 않은 헤드폰이다... (적응에 최소 1주 필요)
익스팬스는 비슷한 가격대의 하이엔드 헤드폰들과 소리 성향이 매우! 크게 다르다! 혹시 예전에 스텔스를 청취해봤다면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겠지만, 첫 DCA 헤드폰으로 익스팬스를 접한다면 컬쳐 쇼크라고 할 만큼 낯선 기분이 들 것이다. 대다수의 고급형 헤드폰들이 기본적으로 든든한 저음과 초저음을 깔고 가는 요즘 흐름과는 조금도 관계없이, 익스팬스는 매우 평탄한 저음과 강한 고.중음을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즐겁게 듣는 헤드폰이 아니라, 최소 1주 정도는 이것만 감상해서 적응을 해야 진짜 맛을 알게 된다.
이 점도 댄 클락 오디오 익스팬스가 지니는 본질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감동을 증폭하는 대신 소리를 최대한 정확하고 명료하게 관찰하도록 만들어놓았으니, 음악을 감성적으로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건조하고 냉정한 헤드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거금을 들여서 익스팬스를 장만하는 유저는 음악보다 '소리'에 훨씬 진지한 성향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리얼 플랫 베이스 - 유난히도 정확한 소리
다시 강조하건대 익스팬스는 명확하게 고.중음의 비중이 높으며 저음이 유난히 평탄한 헤드폰이다. 요즘 나오는 헤드폰들 중 하만 타겟의 영향을 받은 제품들을 생각하면 익스팬스의 저음이 약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고출력의 헤드폰 앰프를 써도, 볼륨을 많이 올려도, 익스팬스의 깔끔하게 조절된 저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스텔스의 저음도 평탄하지만 선이 매우 굵고 힘이 강한 편인데 익스팬스의 저음은 그야말로 플랫(Flat)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데이터를 보면 익스팬스는 스텔스보다 높은 저음(100~200Hz)이 더 강하고 초저음(60Hz 이하)은 조금 더 약하게 되어 있다.
사실, 다른 DCA 헤드폰들도 저음의 펀치가 경쟁사 헤드폰들보다 약한 편이다. 비교적 저음이 더 강하게 튜닝된 Aeon 개방형이나 Ether C 밀폐형에서도 저음의 울림이 더 빠르고 단단하게 마무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댄 클락씨의 성향이며 고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아저씨는 벙벙거리는 저음을 싫어하며 짧게 끊어서 치는 저음을 선호한다. 또한 중음의 품질을 매우 중시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즉, 이 사람은 유난히도 정확한 소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후 등장할 DCA 헤드폰 신제품에서도 V 사운드나 U 사운드가 나올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좋겠다. 체감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 고.중음이 튼실한 플랫 사운드이며 헤드폰 모델에 따라서 저음이 더 늘어나는 정도가 될 것이다.
300~400Hz의 낮은 중음(높은 저음) 영역은 헤드폰의 소리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데, 이 부분이 조금이라도 강조되면 고.중음이 가려지는 마스킹 현상이 발생하거나 사운드 이미지가 흐려질 수 있다. 익스팬스의 굉장히 평탄한 저음은 바로 이 부분을 조절하기 위한 결과다. 이로 인해 익스팬스는 저음 펀치가 약한 헤드폰이 됐지만 그만큼 깨끗한 사운드 이미지와 높은 해상도를 갖추게 됐다.
*공기 흐름만 그대로 전달하는 과학 실험 장비
익스팬스에서 저음의 조절은 소리의 그 외 모든 부분에서 '최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만든다. 이 헤드폰의 소리는 저음만 빼고 모든 측면에서 극단적인 '성능'을 보여준다. 이 성능 특성을 목록으로 만들 수도 있다.
1) 최대한의 투명성. 극히 깨끗한 사운드 이미지.
2) 최대한의 고해상도.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한 음 분리 능력.
3) 최대한의 정확함. 불필요한 잔재가 없으며 극히 빠른 응답을 보인다. 헤드폰 음색의 특징이 아예 없다고 봐도 좋다. 음악 파일 및 소스 기기 쪽의 음색 성향이 무서울 정도로 노출된다.
4) 최대한의 균형. 더 잘 들리도록 강조된 고.중음과 단단하고 명료하게 정돈된 저음이 초정밀 디지털 저울처럼 무게를 맞춘다. 여기에서 초저음이 약간 보강되는 것이다.
익스팬스는 음악의 감성을 배제한다. 진정으로 소리만 관찰하게 된다. '헤드폰 트랜스듀서가 소리를 투명하게 전달만 한다면 음악의 감동이 알아서 따라온다'는 제작자의 생각을 내 몸의 뼈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음향 주관 평가를 하는 본인도 익스팬스의 소리 특징을 감지할 수가 없다. 건조하다. 냉정하다. 인정사정 없다. 아무리 봐도 이 물건은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고가의 장비로써 사용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프로페셔널 오디오 시장은 비용과 파손 가능성 때문에 장비 가격을 조절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익스팬스는 프로페셔널 오디오보다도 더욱 전문적인 소리를 일반 유저들이 듣게 만드는 제품이다. 그래서 음악 장르 구분의 의미가 없다. '음악'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오로지 소리의 품질만 최대로 뽑아내기 때문이다. 이 헤드폰은 음악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소리, '드라이버의 진동판이 만드는 공기 흐름'만 그대로 전달하는 과학 실험 장비에 가깝다. 어떤 음악을 듣든 간에 똑같은 기분이 들지만, 무엇을 듣든 간에 모두 극한의 투명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 또한 헤드파이 분야에서는 색다른 충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후기는 해당 브랜드의 제품 대여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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